서론: 두 시대의 초유의 부채 상황
미국의 총연방부채는 GDP 대비 122%를 상회하며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는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에게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높은 공공부채는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금리 상승 압력을 가중시키며, 미래 세대에게 재정적 부담을 전가한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그러나 역사는 흥미로운 선례를 제시한다.
현재와 유사한 위기가 이미 80여 년 전에 존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미국의 총연방부채는 GDP의 약 119%에 달했다. 전쟁 수행을 위한 막대한 재정 지출의 결과였다.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이 부채 수준의 지속 불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쳐, 미국은 이 부채 비율을 40% 미만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극적인 디폴트나 급격한 긴축 정책 없이, 오히려 경제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재정 위기 앞에서, 이 역사적 성공 사례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청사진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경제 구조와 정치적 현실은 너무나 달라져서, 과거의 해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전후 미국이 어떻게 부채를 줄였는지 그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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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세율 체계 확립
부채 감축의 씨앗은 전쟁 중에 뿌려졌다. 1942년 미국 정부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대적인 세제 개혁을 단행했다. 소득세가 소수 부유층만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세율이 전 계층에서 대폭 인상되었다. 1944년에는 최고 소득세율이 무려 94%까지 치솟았다. 이 초고세율은 극소수 최고소득자들에게 적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세수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1946년, 미국의 연방 부채는 GDP 대비 119%로 정점을 찍었다.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재정 지출을 급격히 삭감했는데, 중요한 점은, 높은 세율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철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높은 세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출은 대폭 줄이니, 결과는 명확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연방 예산은 흑자를 기록했다. 정부는 새로운 빚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 빚의 일부를 실제로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초까지 최고세율은 90% 안팎으로 유지되며 재정 수입 확보와 부의 재분배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2) 금융억압 정책 시작, 인플레이션으로 빚을 ‘녹이다’
1942년 연준(Fed)은 국채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고정했다. 장기 국채는 2.5%, 단기 국채는 0.375% 수준에 묶어두었다.
이른바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다. 이는 정부가 전쟁 비용을 낮은 이자로 조달할 수 있게 만들었고, 194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며 전후 초기 부채 감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후에도 이 금융억압은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 중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폭발하고 물자 부족이 겹치면서 물가가 급등했다. 1946년 연간 CPI 상승률은 약 8.5%, 1947년은 14%를 넘었다. 1946년 말 기준 전년 동월 대비로는 18%까지 치솟았다.
정상적이라면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연준은 1942년에 시작한 금리 고정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장기 국채 금리는 2.5%에 묶여 있었고, 단기 국채는 0.375%였다.
인플레이션이 18%인데 정부가 지불하는 이자는 2.5%라면, 실질금리는 크게 마이너스다.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이자를 지불하지만, 화폐가치 하락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빚이 저절로 줄어드는 셈이다.
동시에 명목 GDP는 인플레이션 덕분에 빠르게 증가했다. 경제가 실질적으로 성장하는 데다 물가까지 오르니, 명목 GDP 증가율은 더욱 높았다. 부채비율의 분모가 빠르게 커진 것이다. 이 금융억압은 재무부와 연준의 Accord가 성사되는 1951년 까지 이뤄지고, 그 이후에도 r < g (명목 이자율 < 명목 GDP 성장률) 환경은 지속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부채감축은 높은 성장뿐 아니라 재정흑자, 예상 밖 인플레이션, 금융억압의 결합으로 설명된다. 정부는 별도의 긴축 없이도 빚을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었다.

3) 미래를 위한 투자: GI법 제정
1944년, 정부는 GI법(재향군인원호법)을 제정했다. 전쟁이 끝나면 귀향할 군인 수백만 명에게 대학 교육비, 직업훈련비, 주택 구입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전쟁 영웅들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졌지만, 이것이 훗날 미국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씨앗이 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GI법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 780만 명의 참전 군인이 GI법을 통해 교육 훈련 혜택을 받았고, 이 중 200만 명 이상이 대학에 진학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대학 교육은 극소수 엘리트의 특권이었는데, 노동자 계층 출신 청년들이 대거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이들은 졸업 후 엔지니어, 의사, 교사, 경영인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생산성 혁명’이 일어났다. 기업들은 숙련된 엔지니어와 기술자를 채용할 수 있었고, 이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 공정을 개선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의 노동생산성이 급증한 배경에는 바로 이 교육받은 노동력이 있었다.
GI법은 주택 구입 자금도 지원했다. 저금리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수백만 가구가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 주택 소유율은 1940년 43.6%에서 1960년 61.9%로 급증했다.
주택을 소유한 중산층 가정들은 왕성한 ‘소비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새 집에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에어컨을 들였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녀 교육에 투자했다. 이들의 소비는 내수 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웠고, 이는 다시 생산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었다.

4) 대량생산과 자동차 경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항공기, 탱크, 군함을 무서운 속도로 찍어내며 세계 최고 수준의 대량생산 기술을 축적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생산 역량은 즉시 민간 산업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그 핵심이었다.
포드를 비롯한 자동차 제조사들은 전시에 갈고닦은 조립라인 기술로 저렴하면서도 품질 좋은 자동차를 대량으로 쏟아냈다. 1920년대만 해도 자동차는 부유층의 사치품이었지만, 전후에는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주택을 소유한 중산층 가구들은 교외로 이주했고, 통근과 쇼핑, 여가를 위해 자동차를 구매했다. 자동차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관련 산업 (철강, 고무, 유리, 석유) 전체가 동반 성장했다.

1956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41,000마일(약 66,000km)에 달하는 주간고속도로망(Interstate Highway System) 건설에 착수했다. 이는 단순한 도로 건설 프로젝트가 아니라 미국 경제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즉각적 효과로 수십만 명의 건설 노동자가 고용되었고, 철강, 시멘트, 아스팔트 산업이 호황을 맞았다. 이것만으로도 단기적인 경기 부양 효과는 충분했다.
장기적으로는 고속도로망이 완성되면서 물류 비용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상품을 동부에서 서부로, 북부에서 남부로 운송하는 시간과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서 전국이 하나의 거대한 통합 시장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또한 고속도로는 교외화(suburbanization)를 가속화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운 주택 단지가 개발되었고, 쇼핑몰과 오피스 파크가 고속도로 주변에 들어섰다. 이는 부동산 개발 붐을 일으켰고, 건설업과 금융업의 성장을 견인했다.
자동차 경제, 물류 혁신, 교외 개발이 삼박자로 맞물리며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효율성을 달성했다.

5) 마셜 플랜: 시장을 창조하다
이 모든 성장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미국의 압도적인 국제적 지위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산업국들을 초토화시켰다.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공장과 인프라는 파괴되었다.
반면 미국 본토는 진주만 공습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쟁 피해가 없었다. 미국의 공장, 농장, 도시는 온전했고, 오히려 전시 생산으로 설비가 현대화되고 확장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 산업 강국이었다. 전후 세계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 (기계, 자동차, 전자제품, 식량)은 사실상 미국이 지배적 공급자였다.
1948년, 미국은 마샬 플랜(Marshall Plan)을 시작했다. 4년간 약 130억 달러(현재 가치로 약 1,500억 달러)를 투입하여 서유럽 16개국의 경제 재건을 도왔다.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전략적인 경제 정책이었다. 원조 자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 제품 구매에 사용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마샬 플랜 자금으로 미국산 기계, 원자재, 식량을 수입했고, 이는 미국 기업들의 매출로 직결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 효과였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번영하는 유럽은 미국 상품의 거대한 지속 가능한 시장이 되었다. 폐허 속의 유럽은 아무것도 살 수 없었지만, 재건된 유럽은 미국 제품의 든든한 고객이 되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달러는 기축통화가 되었다.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 질서가 확립되면서, 미국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이자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결과: 부채비율의 극적 하락 (1950-1974)
이 모든 요소가 맞물리면서 미국 경제는 장기 고도성장 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부채 비율은 극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 ‘재정 흑자’가 부채의 명목 금액 자체를 감소시켰다
- ’인플레이션‘이 부채의 실질 가치인 ’분자’를 명목적, 실질적으로 모두 줄였다
- ‘낮은 금리’(금융억압)가 정부의 이자 부담을 최소화했다.
- ‘고성장’이 부채비율의 ‘분모(GDP)’를 실질적으로 키웠다
수치로 보면 더욱 극적이다:
- 1946년: GDP 대비 119%
- 1956년: 61% (10년 만에 절반 이하)
- 1960년대 후반: 40% 미만
- 1974년: 공공부채(public debt) 기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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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전후 미국의 부채 감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 마련한 정책 기반(고세율, 금융억압, GI법) 위에서, 전후 초기의 재정 건전성과 인플레이션 활용이 더해졌고, 1950년대 들어 인적자본 확대와 인프라 투자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면서 장기 고도성장이 실현되었다.
약 30년에 걸친 이 과정은 정책의 일관성, 시기적절한 투자, 유리한 국제 환경이라는 세 요소가 완벽하게 맞물린 결과였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2025년의 미국이 이 역사를 반복할 수 있을까? 그 조건들은 여전히 존재하는가?